전류전쟁에서 토머스 에디슨을 이기다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테슬라는 혼자 힘으로 공부하여 엔지니어가 된다.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간 그는 축음기와 전구의 발명가로 유명한 토머스 에디슨의 전기 회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만,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에디슨과 견해차가 커지고 다툼 끝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을 눈여겨본 조지 웨스팅하우스와 사업 파트너가 된다. 테슬라는 에디슨이 개발했던 직류 시스템의 약점을 보완한 교류 시스템을 개발했고, 두 사람은 이후 미국 전력 시스템의 표준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했다. 에디슨과의 경쟁은 세계 전기시장의 주도권을 다퉜던 ‘전류전쟁’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에디슨은 악의적으로 교류전류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트리기까지 했으나 교류 시스템이 시카고 세계박람회를 환하게 장식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수력발전소에 적용됨으로써 이 전쟁은 테슬라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전류전쟁에서 승리한 테슬라는 공개적으로 복수에 성공했고, 두 사람은 이후에도 앞다퉈 뛰어난 발명품을 개발하며 라이벌 관계를 이어나갔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시대를 앞선 전기의 마술사
테슬라는 교류 시스템뿐만 아니라 원격 조종으로 움직이는 잠수정, 수직 이착륙 비행기, 고주파 유도 코일인 테슬라 코일 등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 많은 발명을 고안했다. 하지만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테슬라는 규칙적으로 전파를 발사하는 중성자별 ‘펄서’에서 온 신호를 외계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고, 전선 없이 에너지를 전송하려고 하는 등 당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선구자적 기질이 넘쳤다. 이뿐만 아니라 테슬라는 건물을 흔들고 도시 전체를 정전시키는 위험한 실험을 계속하여, 주위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많은 특허를 냈지만 후원자는 찾지 못했다. 테슬라는 전 세계로 통신을 할 수 있는 무선전신탑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으나 연구비가 부족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수많은 구상들 역시 자금 부족 때문에 실제로 구현되지 못하고 연구노트 속에만 남게 된다. 그러나 후대의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기계들은 지금 우리 곁에 남아있다. 테슬라는 라디오를 통한 무선 통신을 최초로 실현시켰고, 이 원리는 현재 라디오나 TV 등에 응용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던 천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테슬라는 시대를 앞선 과학적 통찰력만큼이나 독특한 삶을 살았다. 테슬라는 자신이 발명할 것들을 그리거나 실제로 만들어보지 않고도 머릿속에서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강박증과 편집증으로 인해 온갖 기행을 일삼기도 했는데, 숫자 3에 집착해 모든 행동을 3의 배수로 했다. 결벽증 때문에 식사 전에 식기류를 닦았고,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비둘기에 집착해 그가 살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 그의 유명세와 신비주의를 따르는 추종자 덕분에 사람들은 테슬라를 ‘마술사’, ‘몽상가’, ‘미친 과학자’ 등으로 불렀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헌신했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방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갔던 테슬라를 잊지 않았다. 1960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도량형회의에서 자기장(또는 자속밀도)을 측정하는 데 쓰일 국제단위계(SI)의 공식단위를 ‘테슬라(T)’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2003년에는 테슬라의 기록물이 현대 세계의 발전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관한 자료로 인정받아 ‘니콜라 테슬라 기록물(Nikola Tesla’s Archive)’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같은 해에 그의 이름을 딴 전기자동차 제조회사 테슬라모터스가 탄생했는데, 창업자는 전자결제 시스템인 페이팔을 설립한 일론 머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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