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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교실 게시판입니다.
스타트업 CEO, 에디슨
작성자 주재석 등록일 20.12.11 조회수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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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프롤로그 에디슨을 다시 읽는다

1부. 부활하는 에디슨

1. 에디슨은 누구인가: 발명가에서 기업가, 그리고 혁신가로
2. 포드가 만난 에디슨
3. 산업의 왕들과 발명의 황금시대
4. 실리콘밸리의 에디슨 스피릿

2부. ‘에디슨’ 브랜드의 탄생

1. 독서광 에디슨을 만든 어머니
2. 사랑의 파트너십
3. 떠돌이 전신 기사로 보낸 젊은 시절
4. 보스턴에서, 고난의 행군
5. 발명가를 넘어 경영자로 발돋움하다
6. 전화기 발명 경쟁
7. 마법사, 에디슨
8. 멘로파크 연구소, 19세기의 실리콘밸리

3부. 빛의 제국, 벤처제국

1. 19세기 최대의 블루칩
2. 에디슨의 필라멘트 실험
3. 백열전구 경쟁을 넘어 램프 공장을 짓다
4. 역사적 대전환, 전기 시스템의 창조
5. 겁쟁이 투자자들
6. 에디슨의 벤처제국 건설
7. 전기 시대의 개막: “나는 약속한 것을 모두 해냈습니다”
8. 웨스트오렌지 연구소, 미래의 산업을 위한 전초기지

에필로그 미국 사회의 에디슨 스피릿
부록 ‘에디슨 DNA’를 가진 우리 기업과 연구소
감사의 글

참고문헌

 

 

책 속으로

 

에디슨, 39만 5천 달러를 유치하여 전기산업 창조
에디슨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받은 정규교육이라고는 고작 3개월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보수적이고 깐깐한 뉴욕의 자본가들로부터 39만 5,000달러 투자를 유치해 전기산업을 일
으켰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인데, 이는 19세기 최대의 투자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에디슨은 1878년부터 2년 동안의 연구개발에 매달린 뒤 마침내 ‘에디슨 기계 제작소(Edison Machine Works), 에디슨 램프(Edison Lamp Works) 등 전기산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조하는 기업 설립에 나섰다. 이후 이들 기업은 조직 개편과 인수합병을 거쳐 오늘날의 GE가 되었다.
--- p.12

에디슨은 빛(백열전구), 소리(축음기), 시각(영사기)의 세계를 개척
에디슨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고 끝내 이루어냈다. 처음에 사람들은 에디슨이 보여준 ‘전기’를 도깨비불이라 여겼고 에디슨이 들려준 축음기는 ‘귀신의 소리’라고 생각했다. 백열전구의 빛, 축음기의 소리, 영사기의 시각, 즉 빛과 소리와 시각은 에디슨의 발명 중 가장 위대한 3대 발명이라 할 만하다.
--- p.17

실패! 파산! 해고!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에디슨의 첫 번째 발명품은 의회에서 개표를 도와주는 전기투표기였다. 그러나 그 발명품은 완전히 실패했다. 청년 발명가 에디슨은 이후에도 전신분야에서 여러 개를 발명하고 사업화하려고 하였으나 연거푸 실패했다. (중략) 결국, 파산에 이른 에디슨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뉴욕으로 이주해 길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일자리도 오래가지 못하고 해고를 당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 p.19

포드를 키워낸 스타트업 멘토 에디슨
전기 산업계의 거장 에디슨과 훗날 자동차 산업에서 한 획을 긋게 될 포드가 처음 만난 것은 1896년 8월 11일이었다.(중략) 청년 포드는 에디슨에게 가솔린 자동차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청각 장애가 있었던 에디슨은 포드를 자기 곁으로 불러 다시 물었다. 포드의 설명을 끝까지 경청한 에디슨은 책상을‘꽝’ 내리치면서 말했다.
“포드군, 자네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어. 당장 해봐. 전기 자동차는 무겁고 충전이 필요해. 하지만 자네의 자동차는 가볍고 충전도 필요 없어. 뭘 망설이나”.
(중략) 포드는 이후 자동차 사업에 매진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포드 자동차’를 설립했다. 회사가 번창할수록 포드는 에디슨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으며, 훗날 포드는 에디슨과의 첫 만남에 대해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까지는 어떤 사람도 저를 격려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 스스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때때로 나는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빛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의 천재가 내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완벽한 믿음을 주었습니다. 세계에서 전기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나의 가솔린 모터가 전기 모터보다 낫다고 말해준 것이었습니다.”
--- pp.28~29

산업혁명 시대 ’발명(王)이라는 카테고리를 창조한 에디슨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은 철강·석유·금융 등은 인수합병과 경영의 효율성을 달성하며 점차 안정기로 접어드는 산업 분야였다. 이런 안정적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석유왕’ 존 D. 록펠러,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금융왕’ 존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등이다. 에디슨은 이들 거대한 산업계의 거장들 틈바구니에서 기술혁신을 상징하는 ‘발명왕’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창조한 선구적 인물 중 한 사람이다.
--- p.37

일런 머스크, 테슬라 모터스와 스페이스 X 뒤에 있는 정신은 에디슨의 백열전구와 영사기
영화 [아이언맨Iron Man]의 실제 주인공이자 테슬라 모터스를 창업한 일론 머스크는 최근 우주선 발사 실험에도 성공했다. 2020년 초 트럼프 대통령은 머스크를 에디슨에 빗대 ‘천재’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그런데 에디슨을 닮은 ‘괴짜 천재’ 머스크가 에디슨의 경쟁자였던 테슬라의 이름을 따서 회사 명칭을 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2008년 한 인터뷰에서 이 점에 대해 의문을 품은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회사 이름에 테슬라의 이름을 붙인 것은 전기 자동차의 전원이 교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역할 모델은 에디슨이다. 테슬라 모터스와 스페이스 X 뒤에 있는 정신은 에디슨의 백열전구와 영사기이다.”
--- pp.55~56

나를 만든 분은 어머니, 까딱하면 바보로 살아 갈뻔한 에디슨
부친 새뮤얼은 어린 에디슨을 ‘멍청이’로 대했고 에디슨 스스로도 ‘지진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하지만 에디슨의 어머니 낸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립학교의 평준화된 교육과 그런 교육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낸시 여사는 전직 교사의 경험을 살리고 아이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직접 아이를 가르치겠다고 결심했다. (중략) 낸시 여사는 에디슨이 읽을 책들을 손수 골랐으며, 때로는 그 책을 같이 읽었다. 이런 과정이 4년 동안 이어졌다. 에디슨은 이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어머니는 나를 만든 분입니다. 그녀는 너무나 진실했고 나를 믿어주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내가 절대로 실망을 안겨드려서는 안 되는 한 분이 있다면 그분도 어머니였습니다.”
낸시 여사의 이러한 직접 교육이 없었다면 발명왕 에디슨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훗날 에디슨도 자신이 까딱하면 바보로 살아갈 뻔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 pp.66~67

사회 부적격자 에디슨의 명성을 지킨 아내 미나
에디슨의 두 번째 아내 미나는 유명한 남편과 에디슨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유명 인사들 곁에 머물며 에디슨의 주변 상황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스스로 맡았다. 그녀는 에디슨의 사랑하는 아내, 사업 파트너, 에디슨저택을 경영하는 CEO가 되어 에디슨의 명성과 대중의 환호를 다시금 증폭시켰다. (중략) 사실상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의 홍보부장이자 대외 담당 임원 역할을 했다. 더구나 에디슨의 글레몬트 저택은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등 대통령이 방문한 곳이며, 그 외에도 유명 손님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중략) 에디슨의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그의 악명 또한 높아졌다. 에디슨은 번거로운 일을 싫어해 사교 생활을 멀리했다. 주변에는 사회생활 부적격자라는 말이 나돌았다. 포드가 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초청했으나 무시하고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 미나는 에디슨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크고 작은 시민사회 공동체, 교 육·종교 단체와 더불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힘썼다.
--- p.78

수천수만 개의 전깃불이 뉴욕의 밤을 밝힐 것이고 가스 산업은 사라질 것이다.
1878년 9월 16일 《뉴욕 선》은 “에디슨의 새로운 기적-저렴한 전기요금으로 조명과 난방 그리고 전력을 공급”이라는 획기적인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강렬한 전기 아크등의 불빛을 쪼개어 일반 가정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에디슨이 막 발견해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이어 에디슨은 뉴욕 맨해튼 지역에 수천수만 개의 전깃불을 밝힐 것이며 가스등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전했다. 게다가 전기로 엘리베이터를 운행할 수 있고 재봉틀도 돌릴 수 있고 요리도 할 수 있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비용은 가스보다 싸다고 덧붙였다.
--- p.155

에디슨을 조롱하는 영국의 과학자들, 그러나 가스 산업의 주가는 폭락
에디슨의 전기 선언이 유럽에도 알려지자 유럽의 과학계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에디슨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실바누스 톰프슨(Silvanus Thompson) 은 “최근 에디슨의 발견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여러분에게 그의 방법이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백열전구든 뭐든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며 에디슨을 조롱했다. 또 다른 영국의 전기학자 존 T. 스프레이그(John T. Sprague)는 “에디슨이나 다른 어떤 사람도 자연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전기에서 온 열로 음식을 조리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라고 단언했다. 영국의 또 다른 유명한 전기학자 윌리엄 프리스(William Preece)는 “불빛을 쪼개 만든 전등은 어리석은 불”이라며 에디슨의 생각을 일축했다. 과학계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과는 다르게 가스 산업은 흔들렸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영국의 가스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 p.156

영국의 네이처, 에디슨의 백열전구는 꼼수
백열등의 공개 시연회는 1879년 12월 31일에 이뤄졌다. 그날은 큰 눈이 내리고 추운 날씨였지만 3,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이른 저녁부터 멘로파크로 몰려들었다. (중략) 해가 완전히 져서 깜깜해졌을 때 사람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빛을 보며 정신이 혼미했다. 눈이 휘둥그레졌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중략) 런던의 《타임스 Times》가 백열전구 소식을 유럽에 전하면서 논란이 촉발되었다. (중략) 《네이처》가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건전한 과학지식이라고는 전혀 없이 대중적 쇼에 능숙한 실용적인 사람의 완전한 실패”라며 에디슨과 그의 백열전구를 싸잡아 비하했다. (중략) 영국의 과학 전문 언론 ‘전기와 화학 뉴스’는 에디슨의 백열전구 전시가 ‘꼼수’였던 것이라고 비난했다. (중략) 프랑스의 조명 전문 잡지도 거들었다. “유럽의 동료들은 에디슨이 하나의 발전기로 적어도 50개 나 60개의 백열전구를 밝힐 때까지는 그에 대한 칭찬을 멈추어야 한다”.
--- pp.180~181

4년의 세월과 50만 달러의 자금 투자
그간 에디슨은 비판과 조롱을 받기도 했고, 많은 사람이 그의 꿈에 회의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오늘 이 첫 번째 무대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보다 에디슨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중략) 전구, 전선, 발전기 등 전기조명 시스템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이들 기술을 소비자가 사용하는 제품으로 만들기까지 4년의 세월과 50만 달러의 자금이 투자되었다. 에디슨은 이 모든 것을 연결하기 위하여 스위치를 올렸다.
--- p.223

에디슨은 전기산업을 창조, MIT는 전기공학을 개척
그해 가을 MIT는 미국 최초로 ‘전기공학’ 커리큘럼을 도입했다. 1882년의 전기공학은 이제 막 태동하는 분야였으며, 우선은 물리학의 한 분야로 출발했다. 하지만 이때로부터 10년이 지났을 때 MIT는 졸업생의 27퍼센트를 전기공학도로 배출했다. 산업이 성숙하기 이전에 학문을 개척하고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신속히 따라잡는 MIT의 학풍과 철학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 p.224

 

 

 

저 : 정성창 

 

특허청 부이사관, 주일대사관 특허관 등으로 근무했다. 2019년 12월, 21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과학기술연합대학원 대학교 초빙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기업의 혁신전략, 도시의 혁신생태계, 특허제도의 경제사 등에 관심이 많다. 주요 저서로는 《지식재산 전쟁》(삼성경제연구소, 2005) 등이 있다. 최근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혁신과 지식재산 관련 내용을 기고하고 있다.

 

 

저 : 이가희 

 

문학박사. 2001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에 당선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여 《나를 발효시킨다》(문학세계사, 2004) 시집 외 다수의 저서를 냈다. 2014년부터 지식재산과 문화예술이 융합된 ‘지식재산 스토리텔링’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여 《지식재산 스토리텔링》(지식공감, 2015, 공저)을 출판하고, KAIST 지식재산전략 최고위과정(AIP)에서 ‘지식재산 스토리텔링’ 강의를 하고 있다. 2020년에는 ‘대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을 운영하며 ‘IP스토리텔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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