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휴먼 |
|||||
---|---|---|---|---|---|
작성자 | 주재석 | 등록일 | 22.03.28 | 조회수 | 26 |
나는, 휴먼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주디스 휴먼, 크리스틴 조이너 저/김채원, 문영민 역 | 사계절 | 2022년 03월 18일 | 원제 : Being Heumann
목차 한국어판 서문 주디의 메모 들어가며 1부 뉴욕 브루클린, 1953 1장 나비 2장 반항하는 사람 3장 싸울 것인가, 싸우지 않을 것인가 4장 비행 공포 2부 캘리포니아 버클리, 1977 5장 억류 6장 점령군 7장 전쟁터의 군사들 8장 백악관 3부 캘리포니아 버클리, 1981 9장 결실 10장 친고나, 유능하고 나쁜 여자들 11장 사람들 12장 우리 이야기 감사의 말 주 옮긴이의 글 추천의 글? 주디스 휴먼 연보? 찾아보기?
저 : 주디스 휴먼 (Judith Heumann)
194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생후 18개월에 겪은 소아마비로 인해 휠체어를 탄다.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다섯 살에 학교 입학을 거부당하면서 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긴 투쟁을 시작한다. 1970년 장애를 이유로 교사 면허를 불허한 뉴욕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교사 면허를 취득했고, 1972년 장애인 시민권 단체 동료들과 닉슨 대통령의 재활법 개정안 서명 거부에 항의하며 맨해튼 매디슨 애비뉴의 차선을 점거했다. 1977년 재활법 504조 시행 규정에 서명하지 않는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에 항의하며 100명이 넘는 장애 동료들과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을 24일간 점거한 끝에 서명을 이끌어냈다. 1980년 에드 로버츠, 조앤 리언과 함께 세계장애인기구를 설립하고, 1990년 미국장애인법이 제정되기까지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1993~2001년 클린턴 행정부의 특수교육 및 재활 서비스국 차관보, 2002~2006년 세계은행 최초의 장애와 개발 자문위원, 2010~2017년 오바마 행정부의 국제 장애인 인권에 관한 특별 보좌관으로 일하며 세계 장애 운동의 리더로 활약했다. 2020년 이 모든 투쟁을 함께한 주디스 휴먼과 장애 동료들의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가 공개되었다.
저 : 크리스틴 조이너 (Kristen Joiner)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이자 활동가이다. 『스탠퍼드 소셜 이노베이션 리뷰』를 비롯해 수많은 매체에 배제, 불평등, 사회 변화에 관한 글을 실었다.
역 : 김채원
미국 네바다주립대학교 호텔경영학과,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람중심계획’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역 : 문영민
서울대학교에서 화학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장애인의 생애사와 장애 운동사의 상호 작용에 관심이 있고, 장애인 건강에 관한 생애사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책 속으로 나비였던 나는 애벌레가 되었다 온 세상은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은 집 안에서 침대에 누워 있다. 아픈 사람은 밖에서 놀지 않고, 학교에 가지도 않는다. 아무도 그들이 밖에서 놀거나, 어떤 무리의 일원이 되거나,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마치 그 사실이 내 몸 구석구석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것 같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정도로 굴욕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나에게 계속 숨겼던 걸까? 부끄러움이 배 속 깊숙한 곳에 차가운 덩어리로 자리 잡고 있다가 팔다리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날씨가 맑았던가 흐렸던가. 모르겠다. 알린이 내 휠체어를 밀었고, 우리는 함께 가게에 가서 사탕을 사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나비였던 나는 애벌레가 되었다. --- p.35~36 장애는 의료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장애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연관시켰다. (…) 장애는 개인이 싸우거나 정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의 문제를 ‘고쳐서’ 해결되는 의료적 문제라고 보지 않았다. 우리는 접근성 부재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관점에서 장애는 누군가에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이러한 삶의 진실을 중심으로 인프라와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옳았다. 우리는 시민권 운동과 함께 성장했다.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백인 전용 구역에 앉지 못하는 것에 저항했을 때 나는 여덟 살이었고, 1964년 시민권법이 통과되었을 때는 막 대학생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사회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 아닐까? --- p.74~75 내가 싸우지 않는다면, 누가 이 싸움을 할까 많은 사람이 휠체어에 앉은 여성이 얼마나 잘 가르칠 수 있는지 궁금해하며 지켜볼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 형편없는 교사로 평가받는다면 나의 실패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해 사람들이 장애가 있는 사람은 누구를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장애를 가진 교사가 수천 명 있다면 실력 없는 교사 한 명이 눈에 띌 일은 없다. 그러나 내가 장애를 가진 유일한 교사로서 실패한다면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 그러나 만약 내가 싸우지 않는다면, 누가 이 싸움을 할까? --- p.88~89 정부가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시민권 침해다 나는 장애인이 교육, 고용, 교통 접근성 측면에서 마주하는 삶의 장벽이 일회성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 내 이야기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우리의 장애는 재활로 치료될 수 있는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소아마비로 인한 신경 세포 손상을 극복해서 걷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그것이 내 삶의 목표도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에서 장애인이 되어 돌아온 퇴역 군인의 팔과 다리는 다시 자라지 않으며, 척수 치료를 한다고 해서 그들이 다시 걸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근육위축증을 가진 친구들이 장애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사고, 병, 유전적인 요인, 신경학적 장애, 노화 등은 성별이나 인종과 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학교나 고용주, 시의회가 장애인이 참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책을 만들고 건물을 세우고 버스를 설계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우리의 시민권을 침해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우리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가져야 했다. --- p.91~92 불구자 점령군,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을 점거하다 이런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 경주를 하고 게임을 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도 불렀다. 사생활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다른 모든 일을 하는 가운데 옷도 갈아입고 챙겨야 할 일들을 챙겼다. 그러면서 유대감을 형성해갔다.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우정이 만들어졌다. (…) 그곳에서는 느리거나 다르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짐이 되어도 괜찮았다. 사과를 할 필요도 없었다. 건물 안에서 우리는 마치 캠프에서처럼 가족이나 친구, 혹은 신뢰할 수 없는 대중교통에 의존하지 않고도 쉽게 서로를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를 자주 고립시켰던, 도달할 수 없는 바깥세계가 아득히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 p.178~180 평등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다 평등은 공정성에 관한 이야기다. 접근 기회의 형평성에 대한 이야기다. 나 같은 사람,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수천수만의 우리는 주거나 건강, 교육, 고용 등의 문제에서 접근 기회의 형평성을 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경사로, 더 넓은 출입구, 안전 손잡이, 수어 통역사, 자막, 접근 가능한 기술, 음성 안내, 점자로 된 문서, 지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위한 활동 보조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데도 ‘불만이 많다’, ‘이기적이다’라는 틀에 갇히고 만다. 이런 일은 특히 여성에게 일어난다. 우리는 ‘끝없이 요구하는 사람들’이라 불리고, 물러서지 않으면 ‘끈질기다’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에게 ‘끝없이 요구하는’, ‘끈질긴’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우리를 ‘굴복하게’ 하려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 p.221~222 장애 정체성의 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일에 대한 고유의 시각과 유일무이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특수교육과 재활의 수혜자였고, 자립생활 운동의 리더였다. 전 세계의 장애 이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상원에서 보낸 1년 반이라는 시간은 비록 짧기는 했지만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음이 분명했다. 그 시기를 통해 의회 청문회와 증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게 되었고, 참모진과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OSERS의 차관보 자리에 앉기 전에는 완전히 깨닫지 못했지만, 그동안 나를 준비시켜온 이 모든 경험의 정점이 바로 이 자리였다. (…) 나는 더 많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힘껏 문을 밀고 창문을 열었다. 내 목표는 권력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리고 듣는 것, 협력하는 것. --- p.259~263 장애는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비장애 어린이의 교육 문제 먼저 다루죠. 그런 다음 장애 어린이를 걱정합시다.” (…) 하지만 이것은 무슨 논리인가? 여기에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배울 수 있는 잠재력이 떨어지고, 사회에 기여할 능력도 부족하며, 덜 유능하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즉 우리가 덜 평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가? 장애는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전쟁을 일으킬수록, 의학이 발달할수록 이전 시기라면 아마 죽었을 사람들이 점점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장애를 가진 채.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 p.280~281 우리 사회를 위한 우리의 비전은 무엇인가 당신은 우리 지역 사회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그 안에 머물고 싶다고 선택할 만한 마을과 도시가 되길 바라는가? 우리 혹은 우리 자녀 중 누군가에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변함없이 삶을 유지하며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이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세계를 디자인해야 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을 하고, 개인 활동 보조인을 지원하고, 고용 방식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도시와 사회를 분리와 고립 대신 소속감과 공동체를 키우는 방식으로 디자인할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그런 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옮겨갈 수 있다. 비관론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옮겨갈 수 있다. 어린이처럼. --- p.300~301
|
이전글 | 한 유대인 화학자, 조국을 광복하다 |
---|---|
다음글 | 처음 읽는 식물의 세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