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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교실 게시판입니다.
두 청년, 일자리를 찾다
작성자 *** 등록일 22.09.22 조회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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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패러디의 어린 시절

 

 

   1791년 요크셔(Yorkshire)의 대장장이 한 명이 런던으로 이사해 왔는데, 아들 마이클 패러디(Michael Faraday, 1791~1867)가 태어난 직후에 병으로 죽었다. 그는 가족에게 돈 한 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패러디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13세 때 책방에서 심부름하게 되었다. 주로 하는 일은 신문 배달이었다. (당시 몇몇 신문은 독자들이 빌려서 읽었다. 패러디는 한 집에 신문을 배달하고 독자가 다 읽을 동안 기다렸다가 한 시간 뒤에 그 신문을 찾아서 다른 손님에게 배달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1년 후 그는 어느 제본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일은 그의 장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린 패러디는 대단한 노력가여서 제본할 때 자기 손을 거치는 많은 책을 열심히 읽었다. 특히 한 권의 책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 책은 마셀 부인의 화학에 관한 회화로서 당시 화학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던 책이다. 그 책은 패러디를 처음으로 과학에 흥미를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곧 밤에 열리는 과학강의에 나가 그 강의 내용을 자세히 노트에 적었을 뿐 아니라 이것을 제본해서 훌륭한 책으로 만들었다.

   머지않아 그의 생애에서도 기념해야 할 날이 왔다. 손님 중의 한 사람이 유명한 험프리 데이비가 하는 4회 연속 과학공개 강의에 데려다주었다. 데이비는 당시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에서 화학에 관해 알기 쉽고 재미있는 강의를 해서 상류사회의 청중을 매혹 시켰다. 패러디는 여느 때의 습관대로 강연을 전부 노트에 적어서 뒤에 그것을 깨끗이 정서하고 모아서 제본하니 B5(16절 크기) 386페이지의 책이 되었다.

 

 

   데이비에게 취직을 부탁하다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은 패러디 자신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내가 몸담아 온 장사란 악덕이고 이기적이며 그에 반해서 과학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고매(高邁)하고 자유롭게 만든다는 공상을 했다. 따라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장사를 떠나서 과학에 몸을 바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감히 험프리 데이비 경에게 편지로 나의 소망을 솔직히 피력하고 기회가 있으면 나의 부탁을 들어 달라는 뜻을 밝혔다. 편지와 함께 나는 그의 강의 노트를 부쳤다.

(J. A. Paris, The Life of Sir Humphry Day)

   데이비가 이 편지를 받은 것은 1812년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다. 그는 때마침 찾아온 친구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패러디라는 청년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내 강연을 듣고 왕립연구소에 고용해 달라고 하고 있군. 내게 무슨 일거리가 있을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녀석에게 병 씻는 일이라도 시키게. 그가 쓸모 있는 사람이면 그것을 잘 해낼 것이고, 싫다고 하면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일세.’ 그러나 데이비는 그건 안돼. 좀 더 나은 일로 그를 시험해 봐야 해하고 대답했다.

  데이비는 패러디에 흥미를 갖고 이 21세의 청년에게 친절하게 1월 말에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이렇게 해서 패러디는 데이비와 만났지만, 데이비는 결원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일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또한 과학은 <가혹한 여주인>이고 금전적인 면에서 보면 과학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보잘것없는 보답밖에는 없기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패러디에 자기가 출판하는 책의 제본을 전부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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