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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교실 게시판입니다.
콜카타와 수단의 <검은 굴>
작성자 주재석 등록일 22.11.14 조회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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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도시 콜카타(Calcutta)는 현재 800만을 넘는 인구를 갖고 있으며 한때는 인도의 수도였다. 이 시가 생기고 번영한 것은 주로 영국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의 모험적인 상인들의 덕택이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Elizabeth , 1533~1603, 재위 1558~1603)의 치세(治世) 말엽에 설립되었다. 그 무렵은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the Armada)와 싸워서 크게 승리한 결과 영국의 선원들이 인도와 같은 먼 미개발국가들에 안전하게 항해라고 무역할 수 있게 된 시대였다.

  1686년에 콜카타는 갠지스(Ganges)강 연안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이해에 동인도회사의 지배인 중 한 사람이 이곳에 무역센터를 설립하였다. 위치를 잘 선정했기 때문에 센터의 규모와 그 중요성도 갑자기 중대하였다. 마을은 한쪽이 강이라는 천연의 방벽을 이루고 반대쪽 육상으로부터의 공격은 흙담과 요새를 쌓으면 쉽게 막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토인의 추장으로부터 건축허가도 받고 1696년에는 포트 윌리엄(Fort William)이라고 불리는 요새가 완성되었다. (테일러, 고대인도와 근대인도; W. C. Taylor Ancient and Modena India, 1851)

  이 좋은 자연적 위치와 견고한 인공방위시설 덕택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본부는 콜카타를 가장 안전한 무역센터의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벵골의 태수, 콜카타를 공략

 

  1756년에 젊은 시라지 우드 다 울라(Sirach-yd-Dacia, ?~1757)는 벵골(Bengal)지방의 지도자 즉 태수(nawab)가 되었다. 그 무렵 콜카타의 무역은 연간 100만 파운드를 넘었다. 태수는 그 자리에 오르자 곧 벵골지방에 사는 영국인들에게 싸움을 걸 구실을 찾았다. 아마도 그는 콜카타에 막대한 부가 집중되고 있다는 소문에 크게 자극받았음이 틀림없다.

  17566월 그는 막대한 병력 80문의 대포로 무장한 5만 명의 병사 으로 콜카타는 요새화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정규수비병은 불과 250명 정도의 소부대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콜카타시의 공략은 태수의 대군에게 있어서는 어린애의 손을 비트는 것과 같았다.

  공격군이 콜카타시의 교외에 도착하기 전에 유럽인 부녀자와 어린이의 대부분은 배에 옮겨타고 안전한 강으로 피하였다. 시의 방위시설이 차례차례 파괴됨에 따라 총독이나 많은 건장한 장정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배로 도망하였다. 남은 방위대는 젊은 시의원 홀웰(J. Z. Howell)의 지휘하에 단호히 버텼다. 그들은 쉴 새 없는 싸움으로 죽도록 지쳐 있었다.

  드디어 시 안으로 적을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으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힘은 다하여 여자 한 명을 포함한 146명이 항복하였다. 태수는 포로들을 그날 밤 안전한 곳에 가두라고 명령했고 포로 중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포로 지도자에게 당신이나 당신 동료의 머리털 하나조차도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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