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 달린 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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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 | 등록일 | 22.12.08 | 조회수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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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까지는 음식이 위 속에 있는 동안 어떤 작용을 받는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였다. 많은 사람은 위의 근육이 움직여서 음식을 혼합시키며 소화되기 쉽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은 음식은 위 속에서 단지 썩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었다. 이 방면에 대한 지식이 크게 진보된 것은 1750년쯤 어떤 프랑스 사람이 새를 가지고 실험하였을 때였다. 그는 새의 위에서 위액을 조금 채취해서 시험관에 넣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종류의 음식을 넣어 보았더니 위액이 그 대부분을 녹이고 말았다. 그 후 이탈리아의 과학자는 다른 실험을 해서 위액이 위 자체로부터 분비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총의 오발로 배에 큰 구멍이 나다
1822년에 무서운 사고가 일어나 이것이 후에 소화과정에 관한 지식을 훨씬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W. 보먼트, 《위액에 관한 실험과 관찰》 ; W. Beaumont,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the Gastric Juice 1838). 사고가 일어난 곳은 미시간호(Lake Michigan)와 휴럼(Lake Huron)의 두 큰 호수에서의 수로가 연결되는 곳에 있는 매키낵(Mackinac)이라는 마을이었다. 매키낵은 당시 「아메리칸 모피회사(American Fur Company)」의 거래소였다. 여기는 일찍이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지배를 둘러싸고 영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 사이에도 전투가 거듭된 곳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요새에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822년 6월 이 마을에는 겨울에 잡은 동물의 생피(生皮), 모피 등을 거래하려는 포수나 덫사냥 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카누(canoe)나 보트가 강가에 즐비했고, 아메리칸 모피회사의 점포에는 사람들 — 여행객, 인디언과 약간의 병사들도 있었다 — 로 붐볐다. 점포 안의 많은 사람 틈에 끼어 알렉시스 생마르탱(Alexis Saint-Martin)이라는 19세의 프랑스계 캐나다사람이 있었다. 한 목격자가 이대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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