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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교실 게시판입니다.
국왕을 위해 면양을 훔쳐내다
작성자 주재석 등록일 23.07.12 조회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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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파냐는 옛날부터 메리노(merino)라고 불리는 유명한 면양의 품종을 산출하였다. 이 면양의 털은 가늘고 질이 좋아서 눈이 밴 상품의 천을 짤 수 있었다. 영국은 12세기쯤부터 에스파냐의 양모를 수입하기 시작하여 그 후 몇 년에 걸쳐 수입해 왔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도 활발하게 면양 사육을 시작해 보았으나 그 털은 굵고 거칠어서 하급의 직물밖에는 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와 더불어 유행은 점차로 변화하여 눈이 고운 직물의 수요가 증대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직물업자는 가는 양모를 더욱 많이 구하려고 머리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가는 양모를 입수하는 가능한 방법의 하나는 영국의 국내산 면양을 메리노와 교미시키는 것이었다. 목양(牧羊)이 번창한 링컨셔(Linco Inshrire)에 커다란 영지를 갖고 있는 조지프 뱅크스 경은 이 방법에 퍽 마음이 쏠렸다. 뱅크스는 다방면에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는 탐험가였고 식물학도 연구하였고 또 훨씬 전부터 면양과 양모에, 특히 그의 주()를 그처럼 유명하게 만든 장모종(長毛種)의 면양[링컨(Linoln)종이라 불린다]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 이야기의 시대에 그는 왕립학회의 회장으로 국왕 조지 3(George1738~2820, 재위 1760~1820)의 총신(寵臣)이었다. 조지 3세도 농업에는 대단히 열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에스파냐, 메리노종의 면양을 소중히 지키다.

 

  메리노종의 면양은 그 무렵 에스파냐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왕족, 귀족[그란데(grandees)라 불렸다], 부유한 승원장(僧院長) 등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나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소유자들은 단결하여 메스타(Mesta)라 불리는 조합을 조직했으며 이 조합에는 많은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래스터리, 메리노종 면양 도입의 이야기; C. P. Lasteyrie, An Account of the Introduction of the Merino Sheep, 1810).

  면양은 겨울에서 봄에 걸쳐 평지의 목장의 풀을 먹고 거기서 암양은 보통 12월에 새끼를 낳는다. 그러나 4월이 되면 면양은 산악지방으로 가서 고지의 풍족한 초원에서 여름을 지낸다. 평지에서 산악지방으로 가서 다시 돌아오는 여행은 길었다. 많은 면양도 편도 600km나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면양들은 하루 약 20km의 속도로 걸었다.

  실은 면양이 지나가는 길은 풀이 나 있는 길로서 폭이 약 77m(84야드)로 법률로 정해져 있었다. 실은 지방에서 지방으로 구불구불 굽이쳤고 그 길이 지나가는 토지의 지주들은 모두 한해 한두 번씩 면양의 이동에 대비하여 도로를 깨끗하게 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넓은 휴식처가 정해지고 면양은 거기서 풀을 먹을 수 있었다. 모든 면양은 여행 도중에 털을 깎였다. 강권을 가진 메스타는 경찰에 명하여 면양을 여행 중의 모든 위험, 방해, 저지로부터지키게 하였다. 그 누구도, 보행자조차도 면양의 이동 중에는 양 떼를 따라다니는 사람 이외는 이 길을 걷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또 메스타가 오래전부터 갖고 있는, 특권을 따라서 면양들은 도중에 있는 어떤 목장 마을 사람들의 소유이거나 또는 공유지거나 에서도 자유롭게 풀을 먹일 수 있었다.

  긴 여행은 면양들에게 큰 고통을 강요하였다. 더욱이 봄의 여행은 새끼 양이 나서 4개월밖에 되지 않은 때에 시작되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그러므로 메리노종 양은 좀처럼 살이 찌지 않았으며 고기는 딱딱하고 질겼다. 그러나 면양은 다만 양모를 얻기 위해 기르고 고기는 몹시 가난한 사람이나 양치는 사람밖에 먹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또 여행 도중에 몸이 약한 양들이 많이 죽게 되는 것도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양 떼가 너무 커져서 메스타에서 통제해 내자 못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해마다 많은 면양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양 떼의 여행은 더욱 약한 놈을 도태시켜 양 떼 자체를 솎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양 떼의 한 무리는 약 1만 마리쯤 되고 메스타가 임명한 한 사람의 직원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양 떼는 10개의 작은 떼로 나누어지고 각각 다섯 사람의 양치기와 개들을 거느린 한 사람의 아래 직원에게 위임되었다. 작은 양 떼 하나하나에 약 여섯 마리의 훈련된 숫양, 또는 거세된 양이 있었다. 이것을 만소스(mansos)라 하여 다른 양들을 지도하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방울을 달고 있었으며 양치기의 목소리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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