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해졌는지는 부엌 선반에서 포장 식품 몇 개를 꺼내 성분 표시를 읽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설탕이 들어가 있다. 설탕은 우리의 식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고, 노예제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극심한 환경 오염을 초래했다. 이는 설탕이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알려지지 않은 물질임을 생각할 때 상당히 곤혹스러운 사실이다.
---「머리말」중에서
이 책은 설탕에 관한 책이면서 인간이 만든 설탕의 역사이기도 하다. 밭에서부터 공장까지 녹초가 되도록 노동하여 설탕을 생산한 수백만 노동자의 이야기다. 노예들의 저항, 오늘날의 사탕수수와 사탕무 설탕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저항, 수확한 사탕수수를 거대 기업가에게 넘기지 않고 고집스럽게 스스로 원당을 생산한 수많은 농민이 벌여온 저항의 역사다. 대개 조밀한 가족 네트워크에서 활동한 기업가들도 중요한 행위자다. 대규모 설탕 생산자들은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지녔지만, 사탕수수 설탕 생산자들은 열대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흔하다. 이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증기력, 물리학 화학의 혁명적 지식을 이용하여 정제 설탕을 생산한 사람들이다. 비록 그 진보성이 편협한 계급의 이익에 갇히기는 했지만, 이들이야말로 산업적 근대성을 확산시킨 진정한 식민지 설탕 부르주아지다.
---「머리말」중에서
미국의 거의 모든 식품과 음료에 설탕이 들어간 역사는 세계의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의 극단적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은 세계의 산업 중심지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 소비 유형을 수출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899년, 일본인 이주자 모리나가 다이치로는 미국에서 과자 제조법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일본 최초의 공업적인 사탕 제조 회사를 세웠다. 사탕과자는 때로 10만 부 이상 발행된 일본의 대중적 요리책에 늘 등장했다. 일본은 1910년에 조선을 점령한 뒤 그곳에 사탕과자를 전파했다. 일본 정부는 자와와 식민지 타이완에서 점차 많은 양의 설탕이 들어오자 급속히 도시화한 산업 노동자들에게 싼값에 칼로리를 보충할 수 있다고 설탕을 선전했다. 19세기 영국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하게, 저렴한 설탕은 일본 제국주의 사업의 연료로 여겨졌다. 일본 정부는 1920년대에 설탕을 강력해져야 하는 국가에 필요한 식품으로 내세웠다.
---「14. 천연 식품보다 더 달게」중에서
설탕 소비는 또한 광고 문화의 미국화를 통해서도 촉진되었다. 설탕이 포함된 식품은 미국적 생활 방식의 일부였기 때문에, 설탕 소비는 미국 영화 산업을 통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영화 산업이 날씬함이라는 새로운 신체적 규범을 세웠고, 이는 음식의 개선과 더 위생적인 생활 조건을 통해 결핵이 감소하던 시절에 삽화 광고를 지배했다. 마른 몸은 그전까지는 그 죽음의 질병이 안겨주는 고통과 연결되는 경향이 있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완전히 새로운 함의를 얻었다. 당시 담배 산업은 여성 담배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단 음식이 살을 찌운다는 여성의 인식을 이용했다. 담배 산업은 담배가 여성을 날씬하게 한다고 광고하여 사탕과자와 경쟁했다. “사탕과자 대신 ‘행운(Lucky Strike)’을 잡으세요.”(‘럭키 스트라이크’는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의 담배 브랜드다.)
---「14. 천연 식품보다 더 달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