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이 누구(2016.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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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종석 | 등록일 | 16.08.23 | 조회수 | 203 |
2015-08-22(월)-찬 569장-누가 10:27, 29, 36-37-내 이웃이 누구?
이번 한주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가득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방대한 성경의 내용을 아주 쉽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우리 선생님들도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가르치는 교사가 매우 뛰어난 교사가 될 것임이 확실합니다. “어떤 계명이 큰 계명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 성경의 핵심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하나님은 전심을 다하여, 그리고 이웃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방법론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율법을 가르치는 학자들 사이에 “이웃이 누구냐?” 하는 이웃에 대한 정의와, 이웃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이웃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는 뜨거운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율법을 연구하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질문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혹시 이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선생님들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율법에 정통했던 율법사도 이웃을 정의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율법사의 질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율법사는 자기중심적으로 이웃을 정의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자신에게 유익하고 자신과 근 거리에 있는 사람, 즉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웃 개념을 찾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사의 질문을 듣고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비유를 들어 이웃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대목처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율법사에게 정답을 주지 않고, 되묻는 형태를 취합니다.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렇게 되묻습니다. 예수님의 이웃 개념은 자기중심으로는 이웃을 정의하기가 어렵고, 대신 타자 중심의 이웃 개념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 개념에 더 타당하다는 말씀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 고통과 신음, 좌절과 비탄에 빠진 사람을 목도할 경우 내 자신이 바로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인터넷 통신의 발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눈으로, 피부로 접하는 이웃 개념은 그렇게 확대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세계의 많은 비탄과 고통이 시시각각으로 들려지는 이 때, 이웃의 개념은 그만큼 확대되고, 통신과 인터넷을 발달과 함께 우리 이웃의 개념도 그만큼 넓어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 성경이 증언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그 정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우리 주변에 고통하고 좌절하고 있는 학생, 여러 가지로 힘들어 하는 동료를 발견했다면, 바로 타자적 입장에서 그것을 목도한 우리 모두가 그의 이웃이 되어야 하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실천적 이웃 사랑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 생각에는 누가 고통과 좌절로 신음하는 학생들의 이웃이 되겠느냐?” “네 생각에는 누가 격무로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교사들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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