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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은 나비 ‘박사'가 아니었다?
작성자 주재석 등록일 23.11.03 조회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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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은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나,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그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현 가고시마대 농학부)를 졸업했다. 귀국해 함흥을 거쳐 모교인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나비 연구에 몰두했다.

 

어떤 이들은 박사 학위도 없고 고등전문학교(오늘날의 대학 학부 수준)을 졸업해 교사로 일했던 석주명에게 박사라는 별명은 과장된 것이 아니냐라고 그의 위상을 깎아내리려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당대 한반도의 과학기술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36년을 통틀어 의학을 제외한 이공계 박사 학위를 받은 조선인은 고작 12명에 불과했다. 학부 졸업생을 다 합쳐도 약 300명 남짓이었다. 일제가 한국인 과학기술 인력의 교육을 억제했던 탓에 이공계 전공 대학 졸업자가 평균적으로 1년에 10명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렵게 과학 공부를 마친다 해도 한반도에 과학기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적 일자리가 없었으므로 계속 타국에 머무르며 본의 아닌 유랑 생활을 하는 이도 많았다.

 

이렇게 과학자라는 존재 자체가 희소했으니 대중들이 과학자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 기회도 거의 없었다. 당시 대중의 과학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원철별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원철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해 1926년 미시건대 천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가 됐다.

 

그의 박사 학위논문 주제는 독수리자리 에타(η)별이 밝기가 변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이었다.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존재와 그것이 변광성이라는 사실은 수 천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원철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이 한반도에 소개될 당시에는 맥동변광성이라는 그의 연구 주제를 온전히 이해하고 기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원철이 연구한 별은 언론에 원철성()’이라고 소개됐고, 대중들은 이원철이 마치 새로운 별을 발견해 이름을 붙인 것인양 받아들였다.

 

이런 척박한 현실에서는 박사 학위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누군가 한국인으로서 전문적인 과학 연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 연구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인정받는 연구라면 더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나비 박사'라는 별명은 석주명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가 당시 한반도의 나비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흔들림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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