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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교실 게시판입니다.
말 16마리 대 공기
작성자 *** 등록일 22.07.20 조회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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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 폰 케리케(Otto von Guerica, 1602~86)1602년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수학 특히 기하학과 역학을 배운 다음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외국 여행은 신사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게리케는 제임스 1(James ) 치하의 영국을 방문하고 그 뒤 유럽 대륙의 한두 군데의 대학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마그데부르크는 프로이센(Perußen, Prussia)의 한 주()인 작센(Sachsen)의 수도였다.

   1618년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서 3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30년 전쟁) 전투는 도이칠란트에서 있었다. 게리케는 전쟁에 참여했는데 수학에 소양이 있는 덕택으로 군사 기술자로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의 편이 패배해서 1631년에 마그데부르크가 함락되고 심한 약탈을 당했다. 3만의 주민이 살해되고 중요한 건물들은 거의 파괴됐다. 시의 기사였던 게리케는 다행히도 죽음을 면하고 시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시장으로 뽑혀서 35년간이나 그 자리를 지켰다.

 

 

   게리케의 수기압계

 

 

   시정을 맡아 하는 것도 대단히 바쁜 생활이었으나 게리케는 틈만 있으면 취미로 과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갈릴레이가 공기는 무게를 갖는다고 한 것을 알고 있었다. 또 토리첼리의 연구에도 깊이 흥미를 느꼈다. 그는 연구에 재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머에 대한 감각도 함께 지니고 있어서 신형 수기압계(水氣壓計)를 만들어서 즐기고 있었다. 이 기압계는 놋쇠로 만든 관 네 개를 이어서 약 10m의 길이로 만든 것을 지면에 세워서 그의 집 지붕 아래까지 이르게 했다. 이 긴 관 꼭대기에 가느다란 플라스크를 거꾸로 해서 장치하고 이 관 아래쪽을 물을 채워 둔 큰 통 속에 넣어 두었다. 이 관에서 수기압계의 역할을 하는 물기둥의 높이가 약 32피트로서 위에 장치한 플라스크 안에는 토리첼리 진공이 생기도록 만들었다.

   게리케는 사람 모양을 한 목상(木像) - 마네킹이라고 불렀다.-을 수기압계 속에 넣고 플라스크 안의 수면에 뜨게 했다. 다음에는 관 아래쪽을 완전히 보이지 않게 하여 아무도 목상이 들어 있는 유리그릇밖에는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날씨가 갠 날 수면이 올라오는 높이의 아래쪽은 판자로 둘러싸서 보이지 않게 했다. 그러므로 목상이 보이는 것은 맑게 갠 날 뿐이고 날씨가 나쁘고 공기의 압력이 낮아지면 플라스크 안의 수면도 낮아져서 목상이 판자 뒤에 숨어 버린다. 날씨가 좋은 때만 나타나는 이 일기목상(日氣木像)에 주민들은 크게 감탄했고 그 때문에 명시장 게리케는 일부 시민으로부터 암흑의 힘과 매우 친하지 않나 하는 의혹을 받았다.고 한다. (Encyclopaedia Britannica Supplement,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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